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유레카 그리고 덴 크세로(2) - 영화 오펜하이머(크리스토퍼 놀란 감독) - 역사적 갈등을 중점으로
  • 기사등록 2023-09-18 15:00:01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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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리틀 보이(왼)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펫 맨원자폭탄은 ‘혐오’의 결과물이다. 혐오의 시작은 갈등이었으며 국가, 집단, 인물로 퍼져 나갔다. 

 

국가 간 갈등은 독일, 미국, 일본이 주축을 이뤘다. 당시 미국 과학자들 사이에서는 “독일보다 우선적으로 핵을 개발해야 한다”는 사고가 만연해 있었다. 1942년 오펜하이머를 필두로 ‘맨해튼 프로젝트’가 시행되고, 핵 개발에 성공한다. 그러나 독일 패망으로 미국은 본래 목적을 상실한다. 그들의 타겟은 곧 일본이 된다. 결정의 주요한 요인은 진주만 공습이었다. 진주만 공습은 1941년 12월 7일 미국 하와이 주의 오아후 섬 펄 하버(진주만)에 정박해 있던 미 태평양 함대를 일본이 기습 공격한 사건이다. 이 기습 직후에 미국, 영국 네덜란드가 일본에 선전을 포고했다. 결국 미국은 1945년 8월 6일 히로시마, 8월 9일 나가사키에 원자폭탄을 투여한다.

 

둘 째로, 인물 간 갈등이다. 그 중심에는 오펜하이머와 루이스 스트로스(Lewis L. Strauss)가 있었다. 고등학교 졸업 후 자수성가한 스트로스는 아이젠하워 정부의 상무장관에 지명될 정도로 정치력이 뛰어났다.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공개 석상에서 그의 과학적 무지를 조롱하고 바보로 만들었다. 결국 원한에 사무친 스트로스는 오펜하이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파멸시켰다. 

 

셋 째로, 집단 간 갈등이다. 미국 정부는 1940년대 후반부터 1950년대 초반까지 수소폭탄 계획을 실행한다. 이때 과학자들은 수소폭탄 제작에 있어 찬성과 반대의 입장으로 나뉘기 시작한다. 오펜하이머는 수소폭탄 개발에 반대하는 의견이었다. 그는 원자폭탄이 투하된 후 곧바로 로스앨러모스 연구소 소장직을 사퇴하고 자신의 결정을 후회했다. 훗날 그는 당시 결정에 대해 “현재로서의 나는 더 나은 길이 열렸는지 확신할 수 없다”, “나는 폭탄을 만들고 테스트를 한 것에 대해서는 미안한 마음이 없다. 그렇지만 그것을 사용한 방식에 대해서는 제대로 사용됐다고 느끼지 않는다”고 회고했다.

 

새로운 발견은 늘 ‘유레카’를 외치게 한다. 배후에 ‘덴 크세로’가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. 


[한국미래일보=김정아 대학생 기자]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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